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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계약서를 처음 받아보면 눈이 가는 곳이 정해져 있습니다. 단가, 수량, 납기, 품질 기준. 이 네 개는 열 번쯤 읽죠.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계약서 맨 뒤, Governing Law와 Dispute Resolution이라고 적힌 반 페이지는 그냥 넘겼습니다. 상대가 준 초안 그대로요.
문제는 그 반 페이지가 사고 났을 때 전부를 결정한다는 겁니다. 3차 선적분에서 사양이 슬쩍 바뀌어 오고, 이메일로 항의했더니 "샘플대로 만들었다"는 답이 오고, 그제서야 계약서를 다시 여는 순간에요. 거기에 상대방 도시 이름이 적혀 있으면 그때부터는 다른 게임이 됩니다.

소송으로 이겨도 집행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외 거래처와 다투게 됐다고 해봅시다. 한국 법원에서 이겼습니다.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상대방 재산은 그 나라에 있고, 한국 법원 판결문을 그 나라에 들고 가면 그 나라 법원이 다시 판단합니다. 나라마다 기준이 다르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그때 가봐야 압니다.
중재는 이 지점이 다릅니다. 1958년에 만들어진 뉴욕협약이라는 조약이 있는데, 정식 명칭은 「외국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에 관한 협약」입니다.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가 관리하는 현황표를 보면 172개국이 이 협약의 당사국입니다. 체약국에서 내려진 중재판정은 다른 체약국에서 원칙적으로 승인·집행됩니다.
한국은 1973년 2월 8일에 가입했고 1973년 5월 9일부터 발효됐습니다. 50년이 넘었습니다.
다만 조건이 두 개 붙어 있습니다
한국은 가입할 때 유보 선언을 두 개 했습니다. 이걸 모르고 넘어가는 분이 많은데, 실무에서는 이게 첫 번째 확인 사항입니다.
첫째, 한국은 다른 체약국의 영역에서 내려진 판정에 대해서만 이 협약을 적용합니다. 상대방 국가가 협약 당사국이 아니면 이 경로가 막힙니다. 계약 전에 거래 상대국이 172개국 안에 있는지 확인하셔야 하는 이유입니다.
둘째, 상사관계에서 생긴 분쟁에만 적용합니다. 국내법상 상사로 분류되는 법률관계여야 한다는 뜻인데, 일반적인 수출입·OEM 거래는 여기 들어갑니다.
그리고 중재판정 자체의 힘은 국내법에도 적혀 있습니다. 중재법 제35조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중재판정은 양쪽 당사자 간에 법원의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 대법원까지 세 번 갈 일이 없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빠르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한 번 지면 되돌리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중재로 가려면 합의가 있어야 하고, 그 합의는 서면이어야 합니다
여기가 핵심입니다. 분쟁이 터진 다음에 "우리 중재로 갑시다"라고 해봐야 상대가 응할 이유가 없습니다. 계약할 때 미리 넣어둬야 합니다.
중재법 제8조는 중재합의의 방식을 정해두고 있는데, 별도 합의서로 해도 되고 계약서 안의 한 조항으로 넣어도 됩니다. 다만 서면이어야 합니다. 서명한 문서, 서신·팩스 등으로 주고받은 문서, 또는 중재조항이 들어 있는 다른 문서를 계약서가 인용하는 경우까지 서면으로 봅니다. 전화로 합의했다는 주장은 안 통합니다.

대한상사중재원 표준중재조항, 그리고 비어 있는 네 칸
대한상사중재원(KCAB) 국제중재센터가 공개해둔 표준 문구가 있습니다. 영문 계약서에 그대로 붙여 쓰라고 만들어둔 것입니다.
Any disputes arising out of or in connection with this contract shall be finally settled by arbitration in accordance with the International Arbitration Rules of the Korean Commercial Arbitration Board.
그런데 이 문장만 넣고 끝내면 안 됩니다. 중재원 자체가 네 가지는 당사자가 정해서 채우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중재인의 수. 1인이냐 3인이냐입니다. 3인은 각자 한 명씩 지명하고 그 둘이 의장을 뽑는 구조라 공정해 보이지만, 비용이 대략 세 배가 됩니다. 금액이 크지 않은 거래라면 1인이 현실적입니다.
중재지(seat). 예시로 Seoul, Republic of Korea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중재지는 단순히 회의실 위치가 아니라 그 절차를 감독하는 법원이 어디냐를 정하는 문제입니다. 협상에서 양보하기 제일 아까운 항목이 여기입니다.
언어. 안 정해두면 중재판정부가 계약서 언어 등을 보고 정합니다. 영문 계약이라면 영어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통역과 번역 비용이 붙습니다. 미리 적어두는 게 낫습니다.
준거법. 어느 나라 법으로 판단할지입니다. 예시는 Korean Law입니다. 중재지와 준거법은 별개라서, 서울에서 중재하면서 다른 나라 법을 적용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네 칸 중 하나라도 비워두면 나중에 그 자체가 다툼거리가 됩니다. 계약 단계에서 30분이면 정할 일을, 분쟁 나고 나서 변호사 비용 들여가며 정하게 되는 거죠.
2026년 1월 1일부터 규칙이 바뀌었습니다
KCAB 국제중재규칙이 전면 개정돼서 2026년 1월 1일 이후 접수되는 사건부터 새 규칙이 적용됩니다. 소액·중소 규모 거래를 하는 입장에서 알아둘 만한 건 절차가 두 갈래로 정리됐다는 점입니다.
- 간이절차 — 분쟁금액 5억 원 이하이거나 당사자가 합의한 경우. 중재판정부 구성일부터 3개월 이내 판정.
- 신속절차 — 분쟁금액 5억 원 초과 40억 원 이하. 중재판정부 구성 후 6개월 이내 판정.
개정 전에는 5억 원 이하만 신속절차 대상이었습니다. 40억 원까지 올라온 건 중견 규모 거래에도 빠른 트랙이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이 밖에 조기결정 절차 도입, 판정서 초안 검토 제도, 조정 절차 명문화, 제3자 자금조달 통지의무 같은 항목도 함께 들어갔습니다.
수출 거래 한 건이 몇 억 원대에서 움직이는 회사라면, 다투게 됐을 때 3개월 트랙에 들어가느냐 아니냐는 현금흐름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이겼다면, 그다음에 필요한 서류
중재법 제37조를 보면 중재판정을 실제로 집행하려면 법원의 승인결정 또는 집행결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때 제출해야 하는 게 두 가지입니다. 중재판정의 정본이나 정당하게 인증된 등본, 그리고 중재합의의 정본이나 정당하게 인증된 등본입니다. 외국어로 되어 있으면 인증된 한국어 번역문도 붙여야 합니다.
여기서 실무적으로 자주 걸리는 게 두 번째입니다. 중재합의, 즉 그 계약서를 못 찾는 경우가 있거든요. 이메일로 PDF 받아서 서명하고 스캔해서 다시 보낸 다음, 원본 파일이 어디 갔는지 모르는 상황. 서명본 원본과 스캔본은 계약이 끝나고도 최소 몇 년은 따로 보관하시는 게 좋습니다.

이 글의 한계
저는 변호사가 아닙니다. 여기 적은 건 중재법 조문, 유엔 공식 현황표, 대한상사중재원이 공개한 자료에서 확인되는 사실 위주입니다. 개별 계약에 어떤 조항이 맞는지는 거래 구조와 상대방 국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금액이 큰 계약이라면 반드시 검토를 받으세요. 다만 검토를 받으러 갈 때도 "분쟁조항 네 칸을 어떻게 채울지"를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건 다릅니다. 질문이 구체적일수록 답도 구체적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5분만 쓰신다면
지금 진행 중인 계약서를 하나 열어보세요. Ctrl+F로 arbitration을 찾습니다. 안 나오면 dispute를 찾고요.
조항이 아예 없으면 다음 계약부터 넣으면 됩니다. 조항은 있는데 중재인 수·중재지·언어·준거법이 안 적혀 있으면, 그게 지금 확인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미 서명된 계약이라도 상대와 부속합의서로 보완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계약 앞뒤로 해야 할 일이 더 있습니다
분쟁조항은 마지막 안전장치입니다. 사실 그 앞이 훨씬 깁니다. 공장 후보를 어떻게 찾고, 견적을 뭘 기준으로 비교하고, 실사에서 뭘 보고, NDA와 본계약을 어떤 순서로 주고받고, 첫 양산과 선적에서 어디가 터지는지.
이 흐름을 순서대로 정리한 전자책이 있습니다.
전자책 안내
공장 없이 제품 만들고 해외에 판다
업체 후보 찾기부터 견적 비교, 실사, NDA와 계약서, 첫 양산과 선적까지 실제 진행 순서대로 정리했습니다. 본책과 함께 별책부록 실전 템플릿집이 들어 있어서, 업체 평가 체크리스트와 영문 메일·NDA 템플릿을 그대로 열어 고쳐 쓰실 수 있습니다.
가격은 19,900원, PDF라 결제하시면 바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계약서 뒤쪽 반 페이지는 평소엔 아무 일도 안 합니다. 딱 한 번, 일이 틀어졌을 때만 일을 하죠. 그 한 번을 위해 오늘 30분을 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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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UNCITRAL — 뉴욕협약 당사국 현황 (당사국 172개국, 한국 1973년 2월 8일 가입·1973년 5월 9일 발효, 유보 선언 (a)·(c))
- WIPO Lex — 대한민국 중재법 (제8조 중재합의의 방식, 제35조 중재판정의 효력, 제37조 중재판정의 승인과 집행)
- 대한상사중재원 국제중재센터 — 표준중재조항 (영문 표준 문구, 중재인의 수·중재지·언어·준거법 기재 안내)
- 대한상사중재원 국제중재센터 — 국제중재규칙 (2026년 규칙 게시)
- 법무법인 광장 뉴스레터 — 2026 KCAB 국제중재규칙 개정 (2026년 1월 1일 시행, 간이절차·신속절차 기준금액과 판정 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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